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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야근하지 않는 법 - 미움받을 용기

저희 팀장님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업계에서 이름 꽤나 있는 분이시고, 대화만 나누어 보아도 업에 대한 인사이트가 느껴지는 분입니다. 이 분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요. 업무 시간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아침 6시 10분 경에 출근하셔서 오후 11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십니다. 주말에도 아침같이 나오시는 건 당연합니다. 업무 시간이 꽤나 긴 편인 업종인데도 다른 부하 직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니 말 다 했죠.

반면 저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르게 일을 끝내고 빨리 집에 가려고 하는 편입니다. 이런 저로서는 매우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을 아내로 두고, 자제분도 있으신 팀장님께서 대체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우연히 팀장님께서 당신의 자리에서 페이스북과 유투브로 시간을 때우고 있으신 걸 보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생각했어요. 아, 이 분은 일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고 그냥 일터가 익숙하신 거구나. 이 분은 내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여기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구나.

그래서 저는 팀장님이 아주 가끔 "퇴근해도 될까요"하는 제 메시지를 씹어드셔도, 제가 할 일이 없는 걸 아시면서도 얼른 퇴근하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그 분이 그렇게 밉지는 않습니다. 그냥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셨을 뿐이고 저의 삶의 방식을 모르실 뿐이니까요. 적어도 제가 "필요하신 일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퇴근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핀잔을 주지는 않으시거든요.

오늘도 상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팀장님은 항상 남아 있고, 그 눈치를 보는 대리도 남아 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도 남아야 하고... 정말 끔찍합니다. 저 또한 미처 끝내지 못한 일 때문에 자정에 퇴근하는 것보다 일 없이 두 시간동안 앉아 있는 게 더 싫습니다. 그치만 어쩌겠어요? 내가 퇴근하면 집에 아니 가는 저 상사가 나를 아니꼽게 볼 것이고, 그 밑의 대리가 나에게 핀잔을 줄 것이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직장에서 얄미운 인간이 되기는 싫잖아요. 결국, 5분 뒤에 말해야지. 아니야 눈치 보이니까 10분 뒤에 말하자. 아니야 딱 정각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우리의 저녁 일상은 한 걸음씩 멀어져 갑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더군요. 아무도 저에게 늦게까지 일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 저 스스로 남아있어야만 할 것 같다고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거든요. 그들은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저녁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인데 저는 그들이 제 저녁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지만 저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때문에 오늘부터 저는 나름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드는 부하 직원의 모습은 집어치우기로요. 제게 주어진 일을 완수한 후에는 당당하게 집에 가기로요. 혹여나 누군가가 "팀장님께서 남아계신데 너무 항상 집에 가려고 하는 거 아니냐"라고 물으면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그 날 저녁에 바로 칼퇴하기로요. 아무도 제 저녁 일상을 챙겨주지는 않을 테니까 제 삶은 제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청 고민하다가 퇴근하겠다 말씀드려도 아무렇지 않게 그래. 라고 말씀하실 때 참 허무하기도 하고.)




약 1년 전에 모 커뮤니티에 썼던 글입니다. 심심해서 썼던 글을 뒤적뒤적하다가 발견했네요. 감흥이 새롭습니다. 이런 결심 덕분이었는지 저녁 라이프를 챙기면서 회사생활도 잘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적당히 눈치도 보면서요. (진짜 잘 하고 있는지는 의문)

언젠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읽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제목만 보고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우리는 때때로 시간과 여유를 희생해가며 우리가 하기 싫은 일을 해요. 일도 없는데 눈치보면서 회사에 남아있다거나, 정말 부담스러운 요구이지만 지인의 부탁에 이기지 못해 무리해서 요구를 들어주거나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그 책 제목을 보는 순간,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미움받기 싫어서였구나.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여기서 퇴근한다고 말하면 저 분들이 나를 굉장히 미워하시겠지? 친구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면 나를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겠지? 하는 걱정 때문에 시간과 여유를 희생해가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어거지로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 삶과 여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장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봤어요. 상사가 나를 불성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일을 마치면 퇴근했어요. 남들이 부담스러운 부탁을 했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했고요. 그런데 막상 천지개벽은 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군요. 작은 미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에 후회도 없었습니다. 대신 저녁 일상과 제 자신에게 쓸 시간을 얻었으니까요.

이게 정답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남의 시선 때문에 생각하는 바를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한 번쯤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잠깐의 두려움과 잠깐의 눈초리 대신 주체적인 삶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